슬펐던 내가 지금은 노래를 부르기로 했다 - 03

우인 극단에서 공연하는 연극은 시나리오라고 부를 수 있는 게 없는, 즉흥 공연이라고 한다.

작은 도시의 장인들이 비 오는 밤에 멀리 항해하다가 우연찮게 고대 유적지에 떨어졌는데, 환생해서 뛰어난 능력을 얻고, 우주를 침략해서 은하의 제왕이 되는 이야기

공연의 서사 포인트를 잡아 이야기가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도록 조정한 게 이런 이야기라고…?
아니, 실제 존재하는 소설이나 영화 등의 줄거리에서 따온 이야기로 보이는데… 대체 뭐가 어디서 따온 건지 전혀 감조차 잡히지 않는다.

이거… 괜찮은 걸까?

습격당하는 왕국, 괴물의 공격을 받는 도시.
마왕이 성녀를 납치하자 용감한 이들 몇 명이 대신의 부탁을 받아 마왕을 없애고 성녀를 구하는 여정을 시작한다.

클리셰라고 부를 정도로 뻔한 이야기이다.
하지만 이야기가 클리셰라고 불릴 정도라는 건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그 이야기를 마음에 들어 한다는 거다. 뭐라 해야 할까, 안정성이 높다고 해야 하려나.
아무리 못해도 중박은 친다는 그런 느낌이다.

게다가 성녀가 과거 카니발에서 펼쳤던 연극 역시 이런 '영웅극'이었으니, 진실을 숨기고 있는 수도회 사람들에겐 나름 정곡을 찌르는 내용이 될 거고.

단순히 공연 리허설을 하는 모습만 보여줄 줄 알았는데, 보는 사람 지루하지 말라고 QTE까지 넣어주었다.

어우, 낯간지러워…

어… 정말 이거로 충분한 거야? 연습을 더 해야 한다거나 그런 거 없어?
아무리 우인 극단의 연극이 즉흥 공연이라고 하지만, 방랑자가 한 거라고는 무대 위에서 브렌트의 내레이션을 따라 카를로타와 한 번 춤춘 게 전부잖아.
정말 이걸로 리허설을 끝내도 괜찮은 걸까…?

아, 그렇다고 조금 전의 오글거리는 장면을 또 보고 싶은 건 아니다.
보면 볼수록 나와 연극은 맞지 않는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네…

 

방랑자의 카니발 공연에 꼭 필요한 무언가를 카를로타가 이미 준비했다고 한다. 대체 그게 뭐지?

'그 무언가'의 정체는 다름 아닌 가면이었다. 아, 그래. 카니발에 가면이 없어선 안 되지.
방랑자 것뿐만 아니라 포포 것도 함께 만들었다고 한다.

카를로타가 나이알라에게 가장 좋은 재료로 최선을 다해 만들라고 주문한 걸 보면, 이 가면은 단순한 선물이 아닌 것 같다.
음… 카를로타가 쑥스러워하는 걸 보니, 마치 카를로타가 방랑자에게 마음이 있다는 의미로 보이는데… 단순히 내가 지나치게 생각하고 있는 거겠지?

이미 여러 번 직간접적으로 알려주었듯이, 검은 해안에 편지를 보내 방랑자를 리나시타로 초대한 건 카를로타였다.

몬텔리 가문은 해상 항로를 개척하던 중 검은 해안 군도에 도달하게 되었고, 검은 해안의 과학 기술과 이념에 경탄하여 많은 영감을 얻었다.
몬텔리 가문이 개인 단말기를 만들 기술을 얻은 건 검은 해안에서였던 건가?

몬텔리 가문 하나의 힘만으로는 리나시타에 변화를 줄 수 없었기에, 카를로타는 검은 해안의 힘을 이용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고 보면, 카를로타가 쓴 초대장에 적힌 건 '존경하는 협력 파트너'였지, 방랑자가 아니었다.
마침 검은 해안 역시 방랑자와 포포를 리나시타로 들여보낼 합법적인 경로를 찾고 있었기에, 서로 원하는 것이 맞아떨어져 방랑자의 리나시타 방문이 성사될 수 있었다.

순간 몬텔리 가문이 검은 해안을 리나시타에 끌어들였다는 걸 수도회나 피살리아 가문이 트집잡지 않을까 걱정했다.
그런데 따지고 보니, 외세를 리나시타에 먼저 끌어들인 건 다름 아닌 수도회였다. 잔성회가 외세가 아니면 뭐야? 게다가 각국에서 존중받는 검은 해안과 달리, 잔성회는 국제적으로 수배 중인 테러리스트 집단이잖아.
이건 수도회가 트집 잡는 순간 역으로 공격당하기 딱 좋은 구도이니, 수도회도 여기에 대해선 별 말 않을 것 같다.

방랑자가 리나시타로 올 때 이용한 항로는 몬텔리 가문이 검은 해안에 제공한 것이다. 그래서 카를로타는 우인 극단을 그 항로로 보내, 방랑자를 맞이할 수 있었다.
도중에 회유의 고래의 공격을 받아 배가 전복된 건 카를로타도 미처 예상치 못한 사고였겠지만, 아무튼 브렌트와 우인 극단이 방랑자를 구조할 수 있었으니 아무튼 잘 된 일이겠지.

카를로타가 성녀 플뢰르 드 리스에 대한 일화를 하나 이야기해 준다.

평범한 시골 소녀였던 '플뢰르 드 리스'는 「수호신 감사제」에 쓸 공양용 성주를 몰래 마셨다.
그녀는 술에 취해 비몽사몽 한 상태로 제전의 단상 위에 뛰어올라 비틀대며 우스꽝스러운 춤을 추고 성사용 나팔을 빼앗아 민요를 연주하며 군중 속을 잔뜩 휘젓고 다녔다.
사람들은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 나팔 소리를 따라 행진 대열에 합류했고, 엄숙한 제례는 완전히 웃음거리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아직 순례선 제도가 없었던 때라, 그녀가 받은 처벌은 구금실에 사흘 동안 갇혀 있는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그녀는 그 시간 동안 얌전히 반성하는 대신 구금실의 벽을 온통 자신의 낙서로 가득 채웠다.

나도 카를로타와 같은 생각이다.

그런 말썽꾸러기 소녀를 자신의 대변자로 선택한 수호신이, 수도회가 말하는 것처럼 카니발을 절제 없는 향락이라 생각해 흑조라는 재앙을 내렸을 것 같지가 않거든.

아무리 생각해도 10년 전의 그 흑조 사건은 수호신이 한 게 아니라니까?

권력은 부패한다. 절대 권력은 절대적으로 부패한다.


― 존 에머리치 에드워드 달버그 액튼

감시자들은 누가 감시하는가?


― 만화 「와치맨」 中

카를로타의 말을 들으며 떠올린 명언이다.

수도회가 처음 세워졌을 때의 신앙은 서로 다른 지역에서 온 사람들을 한데 묶어주는 역할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신앙은 관습을 넘어 규범이 되었고, 오히려 사람들을 얽매는 족쇄가 되고 말았다.
제정일치(祭政一致), 혹은 신권정치(神權政治)가 가지는 단점이라고 해야 할까…

제정일치는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통치 방식이나, 여러모로 한계점이 많은 정치 형태이다.

정치와 종교가 분리된, 제정분리 사회에서의 사회 규범은 그렇지 않은 제정일치 사회에서의 사회 규범보다 유연한 편이다. 사회 규범이 바뀌는 데에는 사회 구성원들의 합의만 있으면 되니까.
하지만 제정일치 사회에서의 사회 규범은 바뀌는 일이 없다시피 하다. 제정일치 사회의 규범은 경전에서 오기 마련이고, 경전 내용이 바뀌는 종교는 없으니까.

제정일치 사회는 부패에 훨씬 취약하기도 하다.
제정분리 사회에서 종교는 도덕을 내세워 타락한 정치 세력을 정화할 수 있으며, 정치는 법률을 내세워 타락한 종교 세력을 정화할 수 있다.
하지만 종교와 정치가 하나가 된 제정일치 사회에서 이 둘이 동시에 타락할 경우, 이를 정화할 방법이 없다. 정치 체제가 완전히 뒤집어지지 않는 한 말이다.

종교가 사회를 통제하는 이야기는… 이제 질릴 때가 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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